영생 불노불사의 장단점

1. 개요

불로불사()는 늙지 않고 죽지도 않음을 이르는 말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인간이 꿈꿔왔다. 부귀영화를 누리는 권력자들은 물론 당장 만족스럽지 못한 삶을 사는 사람들까지, 죽지 않으며 영원히 젊음을 유지하는 삶이란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의학 기술이 엄청나게 발달한 현재도 이를 불가능한 꿈이라 여기며 부정하는 이들도 있으나 그럼에도 영원한 삶을 향한 인류의 노력은 멈추지 않고 있으며 실제로도 유의미한 성과도 조금씩 나오고 있다.

인간 본연의 생존 욕구와 노화 및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극단적인 형태로 발현된 것이라 여겨지기도 한다. 종교에서 말하는 환생이나 사후세계영혼 등등의 요소 역시 삶에 대한 욕망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연장선이라는 추측도 있다. 육체는 죽더라도 ‘나 자신’은 어디선가 계속 삶을 지속해 나간다는 이야기를 통해 욕망을 충족시키고 두려움을 상쇄한다는 것.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든 ‘삶은 계속된다’는 식의 이야기는 거의 모든 주요 종교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요소다.

2. 장점

죽지 않는 영원한 삶이 가져다주는 이점은 어마어마하게 많겠지만, 다른 장점들 이전에 불로불사가 주는 가장 중요한 장점은 자신이란 존재가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유지된다는 점 자체일 것이다. 인간은 딱히 무언가를 얻거나 남길 욕구가 없더라도 자신이 언젠가 사라진다는 사실 자체에 두려움을 느낀다. 현생이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쉽사리 죽음을 택하지 않는 이유,[1] 스스로 죽으려 했다가도 마지막 순간 포기하는 이유가 현생에서 희망이 보이지 않더라도 죽음은 그 이상으로 두렵기 때문이다. 불로불사가 실현된다면 이런 두려움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있다.

의식주 문제의 완전한 해결도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의식주가 없으면 살 수 없는데, 불로불사인 사람은 근본적으로 이 문제에서 자유롭다. 물론 단순히 생존이 아닌, 인간다운 삶의 차원에서라면 불로불사인 인간도 의식주가 필요하겠지만, 필수에서 선택으로 바뀐다는 점에서 분명 어마어마한 메리트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이 평생 노동에 시달리며 고통받는 이유도 이 의식주 때문인데, 영원한 삶을 살게 되면 노동 역시 선택이 될 수 있다.

영속성의 보장 외의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불로불사의 최대 장점은 무한한 지식의 습득일 것이다. 일반적인 사람이 생전에 자신의 생계를 위한 직업 관련 또는 흥미 있는 분야에 지식이 한정되는 데 반하여 불로불사인 사람은 이러한 제한에서 해방된다. 자신이 원하는 때 원하는 지식을 습득할 수 있으므로 전 세계의 언어, 심지어 변방 소수 민족의 언어까지 마스터한다거나 현존하는 모든 직업의 전문지식을 습득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존재만으로도 인류의 보고가 될 수 있다.

또 다른 장점으로 만약 불로불사인 자가 수집에 흥미가 있는 경우 그에게 불로불사는 큰 장점이 된다. 수집욕이 매우 강한 사람은 ‘완벽한 컬렉션’을 추구하기 때문에 특정한 브랜드의 모든 제품이나 특정인의 모든 작품 등을 수집하려 하는 경향이 있는데 시간적 제약이 없으므로 ‘언젠가는’ 컬렉션을 완성할 수 있다. 시간이 무한하니 경제적으로도 문제 될 것이 없다. 그 전에 지구가 수명을 다하는 것이 문제 될 뿐.[2]

https://www.youtube.com/embed/C25qzDhGLx8
Why Die?

불로불사는 가능하며, 불로불사는 인간에게 득이 된다는 주장.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그저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인간의 스톡홀름 증후군일 뿐이라는 견해이다.

불로불사를 긍정하는 사람들은 아래 문단에 열거된 “불로불사의 단점”이라는 것들을 불로불사라는 지고의 축복을 향유하지 못하는 인간의 질투심과 시기심, 막연한 불안감과 미지에 대한 공포가 오랜 세월에 걸쳐 투영되고 집적된 산물, 즉 여우의 신포도로 간주한다. 너무 걱정이 많기에 머뭇거리는 것이다.[3]

많은 사람이 불로불사의 고통이 당연한 사실이라고 치부하곤 하는데, 이는 지나치게 한쪽 면만 강조하는 사고방식이다. 물론 단기적으로 심적인 고통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아무도 불로불사가 되어 본 적이 없고 천년씩 사는 정도는 아니더라도 몇백년 정도 평균수명보다 한참 오래 살아본 사람조차 존재하지 않으니 어떤 느낌일지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화나 창작물 등 각종 매체에 등장하는 불로불사자들이 죽음을 갈구하는 이유로는 물론 정신병이 원인일 수도 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다름 아닌 슬프고 괴로운 기억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인간은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당시의 감정까지 생생하게 재생되는 완전 기억은 할 수 없으며, 부모나 친구, 연인을 상실한 사별의 아픔조차도 고작 몇 년만 지나면 아련한 추억으로 사그라드는 것이 보통이다. 다만 예외로 완전기억능력의 경우 제 아무리 슬프고 괴로운 기억도 전부 기억해서 떠오르게 된다. 그리고 인간의 기억은 여차하면 아주 상세한 가짜 기억을 날조하거나, 편리하게 조작하기도, 완전히 지워버리기까지 하는 등, 그다지 정확하지 않다.

학자 중에서 불로불사에 열광하는 사람이 매우 많은데, 이는 상술했듯이 죽지 않기 때문에 지식을 끊임없이 축적하고 탐구할 수 있으며 인간의 문명 발전에 공헌할 수 있는 시간이 더욱 많아지기 때문이다. 즉, 불로불사의 가치는 개개인이 처한 환경이나 가치관, 그 사람의 직업에 따라 달라진다고 할 수 있겠다.

그 단적인 예시로 과거 동양에서 불로불사는 불행이 아니라 최고의 축복이었으며, 도교 신자들이 공통으로 추구하는 이상이자 궁극적인 도달점이었다. 도사들의 목표인 신선이 불로장생을 하며 앞에도 서술되어 있듯이 역사상 진시황이 직접 불로불사를 찾아 떠났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그뿐만 아니라 시간이 흐른 현재에 와서는 불로불사가 마냥 저주라는 서술은 오히려 찾기 힘들다. 데드풀울버린이라세오날완전생물이 된 카즈[4] 등.

이 문서의 그나마 약점이라 할만한 게 필멸자가 불로불사를 이루는 것이 목표로 주로 서술되어 있다. 반면 태어날 때부터 불로불사여서 오히려 자부심 가지고 신경도 안 쓰는 경우도 있다.[5] 물론 태생이 불로불사여도 사는 게 괴로워서가 아닌 남들이 죽으니까 죽어보고 싶어서 죽으려는 좀 특이한 경우도 있다.

미국 만화 THE SANDMAN에는 불로불사 캐릭터에 대한 기존의 음울한 클리셰를 완전히 비꼬아 풍자한 로버트 개들링이라는 불로불사 캐릭터가 등장한다. 평범한 인간이었던 로버트 개들링이 죽음은 무의미한 일이며 자신은 죽기를 원치 않는다고 떠벌리자, 이에 흥미를 느낀 죽음이 그를 불로불사의 몸으로 만들어준 뒤 백 년마다 그 앞에 나타나 아직도 죽고 싶지 않은지 물어본다. 이후 개들링은 흔한 불사 캐릭터들처럼 온갖 비참한 경험과 연인을 잃는 비극을 연거푸 겪게 되는데[6], 그런데도 매번 모르페우스와 죽음이 죽고 싶지 않냐고 물어볼 때마다 대답은 “미친 소리. 가끔은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살 이유가 얼마나 많은데 내가 왜 죽음을 바라겠는가?”였다. 결국 최초의 생명체가 탄생하기 전에 태어나 아득한 세월을 살아온 모르페우스가 죽은 뒤에도 생존하는 위업을 달성한다. 저런 일을 수도 없이 겪고도 저런 대답이 나오는 걸 보면 정신력이 평범해 보이지 않는다.[7]1

불로불사여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이 그 반대급부를 아득히 상회하거나 압도하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위에 나와 있는 대로 시기를 제대로 잡고 일정 수준 이상의 권력과 돈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저소득층은 고소득층보다 기술 공유를 누리지 못하고 정상적인 생활을 누리지 못한 채 살아갈 확률이 크다는 것은 위험 요소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문제는 불로불사 의학 기술이 세상에 처음 등장하여 획기적인 기술의 혜택이 이제 막 대중화가 되어 기술 공유를 누리기 시작한 초창기 시절에나 가능한 일이지, 각국 정부에서 사전대책을 세워놓고 즉각 올바르게 대처하고 변화하면 그만이다.

평범한 사람 입장에서는 단 한 번뿐인 인생으로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재미와 즐거움과 쾌락을 끝없이 영위할 수 있으며, 필연적인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 불로불사의 제일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 전 인류의 불로불사를 연구하는 학자와 같이 원대한 목표나 포부를 가지고 불로불사를 추구하는 것도 분명 보람 있는 일일 것이다. 다만 영생으로서 무료하고 따분할 수 있다는 사실은 어떤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다르다.

불로불사를 하게 되면 삶에 질려서 즐거움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인간은 망각을 한다. 기억력이 아무리 좋더라도 모든 것을 완벽하게 기억할 수는 없다. 뇌를 개조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살면서 많은 것들을 잊으며, 또한 많은 것을 배우며 산다. 노인이 젊은이보다 더 지혜로울지언정 더 지식이 많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잊기 때문이다. 망각의 축복이 인간과 함께하는 한, 무언가에 질릴 걱정은 없다는 의견이 많다. 그것을 즐겼던 기억이 잊힐 때쯤 다시 즐기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만약 기억이 절대적이라면 모든 사람은 한번 클리어한 게임이나 한번 본 영화를 두 번 봐야 할 유인이 전혀 없다. 특히 스포츠 같은 건 매번 할 때마다 변수가 매우 다양하게 나오지만 게임이나 영화 같은 건 스토리도 다 알고 진행 방식도 알기 때문. 그런데도 사람들은 즐거움을 느꼈던 장소에 또 방문하고, 훌륭한 작품들을 수십, 수백 번씩 돌려본다. 이미 해봐서 재미없다는 개념은 단기간 내에 똑같은 행동을 수십 번 반복했을 때 나올 수 있는 이야기인데 심지어 본인이 불로불사라면 자기가 미디어를 소화하는 속도보다 발매하는 속도가 더 빠를 수 있다.[8] 오히려 불로불사를 겪어본 사람이 없다 보니 “오래 살면 질리겠지.” 하는 게 결국 유한한 삶을 산 사람의 상상력의 한계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기억력의 한계로 인해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게 되거나 주기적으로 기억포맷을 한다면 결국에는 기억의 관점만 보면 원래의 나와 다른존재가 되는 게 아니냐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건 그냥 사람의 정체성을 이루는데 직접 관련있는 핵심적인 기억이랑 경험과 사람의 기본적인 정보를 담고 있는 기억만 따로 저장하면 해결되는 문제다.

3. 단점

“I want to go when I want. It is tasteless to prolong life artificially. I have done my share, it is time to go. I will do it elegantly.”
“나는 내가 떠나고 싶을 때 떠나고 싶소. 인간의 기술로 삶을 늘리는 건 천박한 짓인 거 같소. 내 사명은 이제 끝냈으니, 우아하게 갈 때라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물론 단점이 없는 건 아니다. “질린다. 갈 땐 가더라도 할 건 다 하고 가겠다.” 식으로 답하는 사람도 많다.

영원한 생명도 불만으로 이어질 수 있다. 모든 질병을 고치는 치료법, 노화를 효과적으로 막아주는 요법, 젊음을 영원히 유지하는 회춘 요법 등을 찾아냈다고 하자. 그 직접적인 결과는 분노와 불안이 사상 유례없이 광범위하게 일어나는 현상일 것이다. 새로운 기적의 요법을 받을 돈이 없는 사람(대다수의 사람)들은 격렬한 박탈감에 휩싸일 것이다. 역사를 통틀어 가난하고 압박받는 사람들이 자신을 위안해온 것은 적어도 죽음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온다는 사실이었다. 부자나 권력자도 죽을 수밖에 없다는 믿음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은 죽어야 하는데 부자는 영원히 젊고 아름답게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불로불사를 할 수 있는 경제적 여유가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도 그렇게 행복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걱정해야 할 일이 많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요법이 생명과 젊음을 연장해줄 수는 있지만, 시신을 되살리지는 못한다. 나와 내 사랑하는 이가 영원히 살 수는 있지만 트럭에 치이거나 살인마에게 당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만 그렇다고 생각해보자. 영원히 살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 사람들은 심지어 아주 작은 위험을 무릅쓰는 것도 몹시 싫어하게 될 것이며, 배우자나 자녀, 친한 친구를 잃는 데 따르는 고통을 견딜 수 없게 될 것이다.

여신 에오스의 애인이었던 티토노스의 이야기로, 트로이의 왕자(!)였던 티토노스에 반한 에오스는 티토노스를 납치했다. 이후 제우스에게 빌어서 불사의 몸을 준 건 좋았는데 늙지 않게 해달라는 건 잊어버리고 말 안 하는 통에 죽지만 않고 나이는 나이대로 먹는 신세가 되어, 나중에는 자기 몸도 못 가누게 되어 버렸다. 결국 에오스는 티토노스를 구석방에 쑤셔 박아 두고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죽지도 못한 티토노스는 매미가 되었다는 슬픈 이야기. 전승에 따라 메뚜기가 되었다거나 건포도처럼 말라비틀어져 쪼그라들었다던지, 늙은 몸으로 죽지도 못하는 티토노스를 가엾게 여긴 에오스가 매미로 만들었다 등등 여러 버전이 있다.

파우스트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육신적으로는 건장한 청년이 되었으나 불행한 일들을 강요받는다.

또 하나의 예로는 그리스 신화의 히드라. 히드라는 가운데 머리가 불사라서 헤라클레스가 아예 바위로 뭉개버렸지만 죽지 못했다. 결국 수천 년 동안 바위 아래 산 채로 깔리게 되었다. 그 외에 고르곤 세 자매, 아틀라스프로메테우스케이론 등[9], 죽지 못해 고생하는 인물은 참 많다.

서유기의 손오공 역시 불로불사이지만, 500년 동안이나 바위산에 깔려 고생했다. 삼장법사가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영원히 그 꼴로 생각조차 그만뒀겠지만 삼장법사가 구해서 손오공은 삼장법사를 보좌해 서역으로 여행을 떠났다. 이후 장군이었지만 그 신분을 박탈당해 하계로 내려온 저팔계와 사오정이 일행에 합류했다.

설령 회춘과 불사를 동시에 이루었다고는 해도, 그게 과연 행복할지는 절대로 장담할 수 없다. 영화 죽어야 사는 여자에서 브루스 윌리스가 연기한 ‘멘빌’이 자기에게 불로불사의 묘약을 권하는 여자인 ‘리즐’에게 외치는 대사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10]

(영원히 산다는 말을 들은 후) 그 다음은?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데? 난 영원히 살고 싶지 않아. 말이야 좋지, 그럼 난 뭘 해? 따분해지면? 외로워지면? 누구랑 살아? 메들린? 헬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떡해? 불구가 되면? 총에 맞으면? 누가 날 계단에서 밀어서…굴러 떨어지면?[11]

(그 대신 절대로 늙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후)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 늙을 거야. 그럼 주변 사람들이 모두 죽는 걸 지켜봐야 하는데? 그게 정말 행복한 거야?! 이건 옳지 않아. 달콤한 꿈이 아니라 악몽이라고![12]

또한 닥터후에서 기적의 날에서 불로불사의 부작용이 드러나며, 12대 닥터도 시즌 9 에피소드 5 ‘죽었던 소녀(The Girl Who Died)’에서 불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불멸이란 영원히 사는 게 아니야. 그런 느낌이 아니지. 불멸은 나 외의 모든 사람이 죽는 거야.

이처럼 불로불사에 힐링팩터가 첨가되어 있지 않으면 몸이 걸레 쪼가리급으로 해체되었는데도 안 죽는다거나 하는 불행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일단 힐링팩터가 없다면 상식적으로 자신이 살아있는 세포의 집합체가 되지 않는 한 손상에 의한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신경전달부터가 안 되는 “몸의 일부”가 알아서 재생하고 움직인다는 건 상식적으로도 과학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다. 이게 판타지적, 마법적 요소에 기인하는 경우라면 설명은 가능하지만, 당연히 비현실적. 삶과 죽음에 대한 블랙 유머의 하나로 보는 것이 좋다. 반대로 ‘불로’는 얻었는데 ‘불사’는 얻지 못한 이들도 있다.

특이한 것은 창작물에서 불로불사의 꿈을 이룬 인물은 오히려 죽고 싶어서 기를 쓰는 경우가 많다는 점. 대부분 주체할 수 없는 세월의 무게에 짓눌리는 경우가 많다. 보통 양판소에서는 반영구 불로불사인 드래곤이 그런 경우가 많은데, 그것을 드래곤과 신의 차이라고도 한다. 결국 육신이 있는 생명체로서 지닌 한계인 것처럼 묘사되곤 한다. 혹은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죽음에 대한 체념의 정서 혹은 정신승리를 내재하고 있으므로, 그것이 반영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대체로 영웅담에 부록처럼 끼어 다니며 인간과 초월자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부처님이 말 했듯이 “인생은 고행”이므로 짧고 굵게 가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는 양면적 속성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일부 창작물에서는 육체는 불사지만 정신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서서히 정신이 마모되어가다가 자아마저 잃고 죽는 것보다 못한 상태로 전락하는 케이스도 존재한다. 소울 시리즈가 대표적.

혼자 또는 소수의 사람만 영생하게 되면 주변인의 죽음이라는 크나큰 문제가 생긴다. 이렇게 되면 본인은 늙지 않고 영원히 살지만 주변인들은 그렇지 않으므로 주변인들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겪어야 한다. 새로운 사람들을 사귀더라도 그 사람들도 언젠가는 늙고 죽기 때문에 주변인들이 죽는 모습을 계속 보고 심리적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그래서 영생을 완전히 대중화시켜 최대한 많은 사람이 누리게 하는 것이 목표지만, 대중화가 되어도 영생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상당수 존재할 수밖에 없으므로 “당신이 죽으면 너무 슬퍼서 못 견딜 것 같아요! 영생 시술을 받으세요!”라는 식으로 강요하는 사람과 영생을 거부하는 사람 간에 갈등이 생길 것이며 이런 갈등은 삶과 죽음이라는 매우 중대한 문제라서 일반인이 해결하기 어려우니 해결을 도와 줄 전문 상담사도 필요하다.

평균 수명이 수백 세 이상이 되거나 무한해지면 나이가 많은 사람과 적은 사람 간의 세대 차 및 세대 갈등이 심해져서 중대한 사회 문제가 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지만, 의 노화를 멈추면 정신적 노화[13]도 진행되지 않는 것이므로 마음이 늙는 일도 없어 나이가 많아져도 청춘처럼 살 수 있으니 세대 차이로 인한 문제는 심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영원히 살면 삶의 즐거움이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새로운 문화가 계속 등장하므로 삶에 질릴 일은 없다는 의견도 있지만, 너무 오래 살면 질릴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14][15] 이게 무슨 소리냐, 말 그대로다. 사람들 간의 견해차는 있어도 인간이 사는데 중요한 요소는 쾌락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쾌락은 단순한 엔도르핀 분비 같은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즐거움을 모두 포함한다. 목적을 이루었을 때 성취감이라든가 먹을 것을 먹을 때의 행복함 등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이 있다. 모든 것은 하다 보면 언젠가는 질린다. 당장 매 3끼를 같은 식사만 해도 질리는 인간이, 앞으로 먹을, 혹은 경험할 모든 것이 질리지 않을 수 있을까? 물론 혹자는 음식에 종류는 무한하고 경험하는 시간도 무한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영생 앞에서는 티끌만큼도 되지 않는 시간이다. 혹여 정말로 영원히 여러 액션을 통해 쾌락을 얻을 수 있다 쳐도, 행동 자체에 질리지 않을 거란 보장은 없다.[16] 예를 들어 여행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영생하게 되어 계속 여행을 다니면 돈이 많이 들어가게 되는 건 차치하더라도 여행지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여행에 질리게 되고, 기존에 없던 여행지가 새로 생겨나도 여행 자체에 질려서 감흥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는 주장이다. 몇억 년, 몇조 년 이상을 살면 어느 순간부터 숨 쉬는 것 자체가 귀찮아질 날이 무조건 오게 된다는 주장도 있다.[17] 이 경우에는 5억 년 버튼 시나리오랑 유사한 상황이 된다.[18] 다만 5억 년 버튼에선 결국 지겨움에도 적응했다.
그럼 즐거움의 한계를 느끼는 를 개조하면 되지 않는가? 현실에서도 가장 가까운 예가 있다. 뇌를 개조하지 않고도 평생을 쾌락을 느끼게 해주는 것. 바로 마약이다.[19] 즐거움을 얻기 위해 지루하지 않은 영원한 쾌락을 얻을 수 있다고 해도, 현실의 마약에서 벗어난 약쟁이들이 그렇듯 마약은 몸과 정신을 만신창이로 만드므로 대부분의 사람은 그런 삶은 원하지 않을 것이다.

윤리적인 문제로는 기억의 문제가 있다. 불사한다면 당연히 오랜 시간 동안의 기억을 받아들일 수 있게 뇌가 변할 것이다. 그렇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는 과거를 대부분 잊게 된다. 그때의 자신도 자기 자신이라 할 수 있을까? 순전히 기억의 관점으로 본다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인격도 수만 년이 지나면 바뀔 것이고 그에 따라 모든 것이 바뀐다. 영원이라는 시간 앞에서는. 대부분의 사람은 현재의 자기 자신으로서 행복을 얻기를 원하지, 자기 자신과 모든 면이 다른 존재가 된다면 그것을 진정한 행복이라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20][21] 삶에 질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뇌를 조작하여 기억을 100년 주기 등 특정 주기마다 리셋한다고 하여도 이와 비슷한 문제가 생긴다. 물론 이 문제는 굳이 영생뿐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적용되는 문제긴 하다. 그래도 생각은 해볼 만한 문제. 다만 정체성과 연관된 핵심적인 기억을 유지하면 이 문제는 해결된다

사람들이 게을러지고 나태해진다는 것도 큰 문제다. 영원히 살게 되면 인생의 시간제한이 사라지는 것이므로 대부분의 사람은 인생의 목표와 같은 힘든 일들을 나중으로 계속 미루고 편한 대로만 살아가려고 하게 된다. 이런 생활에 익숙해지면 아예 일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게 되어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결국 여러 가지 중대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학교와 비슷한 형태의 교육기관을 만들어 영생하게 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오랜 기간의 특수교육을 하여 나태해지지 않도록 하고, 교육을 수료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많은 벌금을 부과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인구 과잉 문제도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사람들이 출생(탄생)만 하고 사망(소멸)하지 않으면 인구가 급속도로 늘어나서 생활공간, 식량 등이 부족해진다. 우주 관련 기술이 발전하여 인류를 다른 행성으로 이주시키면 해결할 수 있지만, 지구에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낯선 곳에 강제로 보내 버리면 엄청난 반발이 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영생이 실현된다면 영생하게 된 사람은 의무적으로 불임수술을 하여 아이를 갖지 못하게 하고, 아이를 갖는 것을 원할 경우에는 많은 세금을 내야만 불임수술을 해제하고 임신할 수 있도록 하는 것[22]이 가장 유력한 대책이다.

또한 세대교체가 되지 않는다. 불로불사로 슈퍼스타인 배우와 가수들이 계속 살면 새로운 배우나 가수가 성공하기 점점 힘들어질 것이고 스포츠스타가 영원히 건강한 몸을 유지하면 팀과 쓸 선수자리는 한정돼있어 시간이 갈수록 그들만의 전유물이 될것이다. 류현진이 100000이닝을 먹거나 손흥민이 100000골을 넣는 걸 상상해보자. 선수나 배우, 가수들도 사람이어서 질리면 몸상태와 상관없이 은퇴할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불로불사면 당연히 늙어서 은퇴해야 하지도 않으니 돈을 계속 벌어야하니 반강제로 직업을 유지해야할 것이다. 당연하겠지만 세대 갈등 문제도 지금과는 비교가 안되게 심각한 사회적 이유로 번질 가능성이 크다. 세대 갈등 문서를 봐도 잘 알겠지만 현대의 세대갈등은 과거에 비해 늘어난 평균수명으로 인하여 이슈화된 사회적 현상인데, 평균수명이 80년 언저리한 지금도 국가를 막론하고 세대갈등은 사회적 이슈로 화두가 되고있는 마당에 평균수명이 수천살 내지 수만살 그 이상으로 늘어나 버리면 100살 차이는 애교고 수천살 이상 차이나는 사람과 한 시대, 한 공간에 같이 있는 일도 많아질 것이고, 몇백살 내지 몇천살 나이차이 나는 사람과의 세대차는 안봐도 비디오일 것이다. 즉 삼국시대 내지 고려 시대에 태어난 사람이 21세기 대한민국 시대에 생존해 있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것이다.

또 사람이 영생을 거부하는 것과 자연사를 거부하는 건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 자연의 이치에 따라 주어진 생명을 살고 가는 것과 삶이 너무 힘들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리고 인간답게 죽을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는 현대사회에서 안락사를 허용하는 경우는 매우 제한되어 있다. 중병을 앓고 있어 도저히 고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의사가 증명해야 가능하며, 그것도 극히 일부 국가에서나 가능하다. 즉, 제한 없이 안락사를 허용한 역사가 인류에겐 없으므로, 죽을 때 겪게 되는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사람, 혹은 그 고통보다 삶이 더 힘들고 그 고통을 이겨낼 용기를 가진 사람만이 자연사를 거부할 수 있게 된다. 특히 한국처럼 총기를 구할 수 없는 나라에서는, 높은 건물이나 다리에서 뛰어내리고 지하철에 뛰어들고, 질식의 고통을 느끼며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등 자연사를 거부하기 위해선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따라서 사람들이 최대한 오래 살기 원하고, 자연사보다 오래 살 수 있는 영생의 기회가 왔을 때 그걸 거부할 거라고 생각하기 힘들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당장 교통사고로 전신불수가 온 사람에게 불로불사를 제안하면, 지금 나한테 저주 거는 거냐를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과학소년의 2003년경 만화 만약의 세계 인간이 영원히 늙어죽지 않는다면 편에서 주인공 차태웅이 만든 판도라라는 이름의 약으로 해당 약을 먹으면 늙어죽지 않으나 아이를 가질 수 없는[23] 효과가 있는데 이로 인해 온 인류가 불로의 삶을 유지하지만 주인공의 스승인 노미남박사는 인류에게 재앙을 가져올 약이라고 경고하고 먹기를 거부했고 30년 후의 장례식에서 판도라로 인해 인류에 재앙이 오면 자신이 만든 약으로 인류를 구하라는 내용의 유서를 보좌로봇이 공개하는데 처음에는 마냥 좋은 듯 했으나 300년이 흐르자 인류는 새로운 지식을 담기 위해 과거의 기억을 잊어야 했고 머리에 칩을 이식해야 했으며 1000년이 흐르자 사고가 나면 평생 불구로 살아야 하고, 2000년이 흐르자 방사능 누적과 기후변화 폐해가 생겨나고 8000년이 흐르자 인류는 세대교체를 이루어낸 다른 동물들에게 밀려나자 주인공일행은 박사가 남긴 약을 찾는데 인류는 세대교체가 필요하다는 내용의 쪽지가 함께 있어서 차태웅은 자기가 잘못했다고 외치면서 꿈에서 깨어난다는 내용이다.

  1. ↩︎
gizman: